-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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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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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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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정세운
정세운(鄭世雲)은 고려 말기의 무신(武臣)으로 공민왕(恭愍王) 재위기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면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난(國難)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난세의 영웅이었으나 음모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정세운 장군의 본관은 광주이며 광산출신으로 고려 공명왕 때의 충신이자 뛰어난 장군이다. 강릉대군(江陵大君,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적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5년(1356년)에 역적 기철을 때려죽인 공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기철은 원나라 순종황후 기씨의 큰 오빠로 그 당시 기씨 형제들은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공민왕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궁중에서 술잔치를 열어 불러들인 뒤 기철과 그 추종자를 없애고 서울에 계엄령을 내려 그 일당들을 모두 제거했다. 정세운 장군은 이때의 공로로 일등공신의 서열에 끼게 되면서 김용(金鏞)과 왕의 총애를 다투게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울은 함락당하고 만다. 정세운 장군은 왕을 호송하면서 임금에게 민심을 위로 하도록 하고 자신은 여러 고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치게 해줄 것을 주청하였다.
1362년 1월 공민왕은 정세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홍건적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왕명을 받고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나라 안에 침입한 정세운 장군은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하여 1363년(공민왕 12년) 호종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항상 사이가 좋지 않던 김용의 계략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뒤에 그 무고함이 밝혀져 그 당시의 최고 통치 기관의 으뜸 벼슬인 첨의정승이 추증 되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세의 영웅이자 비운의 무장인 정세운 장군은 후세에 남겨진 개인적 기록이 거의 없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정세운 장군은 광주 정씨 가문의 시조로 무량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유집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