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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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채(李景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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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치
조선 전기의 무신 오자치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무예를 닦으며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고 병서를 두루 읽으며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후 무과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오자치는 주부벼슬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부장 조석문과 더불어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이시애, 이시합의 형제를 평정하여 왕이 훈장을 내렸다. 1476년(성종 7) 9월 부친의 봉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
현재 그의 영정인 ‘오자치 영정(吳自治影幀)’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 화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로 보물 1190호로 지정되었다. 또 광산구 지평리에는 오자치가 자신의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석을 깨뜨려 만들었다는 ‘오자치 용마’가 있다. 오자치의 용마바위에 관한 전설은 오자치의 강인함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오자치 장군은 민가에 피해를 주던 야생마를 단숨에 잡아 길들이고 말과 함께 무예를 닦던 중 하루는 ‘말이 화살보다 느릴 경우 목을 베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복룡산을 향해 화살을 쏜 오자치는 말을 타고 달려 산위에 도착해 화살을 찾아보았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벴다. 그 순간 화살이 뒤에 날아와 꽂혔고 오자치 장군은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며 그곳에 놓인 자연석을 이용해 비석을 세운 뒤 죽은 말을 달랬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바위를 부숴 도로공사에 사용하려고 했다가 돌을 떨어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이 있었다는 등 이 용마바위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묘와 영당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용진산 아래 원당마을 원당영각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자치 장군의 재실인 시기재와 근처엔 재현된 용마바위가 놓여있다.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 일이 생기면 꽃을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1467년(세조 13년) 길주의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북도의 수령방백(守令方伯)을 남도 사람으로 임명하는데 불만을 품고 동생 이시합(李施合)과 매부인 이명효(李明孝)와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경관(京官:중앙관직)출신의 북도 수령과 관리를 죽이는 등 한때, 그 세력이 널리 뻗어갔다.
그러나 북청만령(北靑蔓嶺)에서 정부군에게 패한 후로는 기세가 꺽이어 경성(京城)으로 퇴각 하였다. 이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세조는 친히 역마를 보내어 공을 불러 편전으로 들게하고 주석을 베풀어 술(御覓)을 내리면서 반란군의 평정에 힘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부장 조석문(曺錫文)과 더불어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이시애, 이시합의 형제를 잡아 죽이고 그 부하들을 항복받아 개선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비각을 세워 도형비석(圖形碑石)에 기적을 새기게 하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하였으며 적개(敵愾) 2등 훈장을 내리었다. 졸후에 양평(襄平)이라 시호를 내리고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