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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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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수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호걸 선비, 임형수

  • 광주 광산구 등임동 341-1

임형수의 본관은 평택이며 1514년 북명사(北兵使) 임준(林畯)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호걸스럽고 글을 잘했을 뿐 아니라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선비로서 장차 나라를 다스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촉망을 받았다.

임형수는 외모가 준수(俊秀)하고 풍의(風儀)가 멋졌으며 언행이 활달하고 기개를 숭상했다. 자잘한 관습이나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시원스럽게 행동했다. 식견이 뛰어나고 담론이 비범하고 참신했으며 해학에도 능해 남들로 하여금 솔깃해 귀 기울여 듣게 했다. 또 궁마(弓馬)에도 솜씨가 있어서 재능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임형수는 어떤 일로 시험을 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나라의 큰 일을 맡길 만한 인물로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퇴계는 임형수와 기질이나 취미가 달랐지만 그를 유난히 가까이했고 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퇴계는 임형수 생전에 매양 그를 기남자(奇男子)라고 칭찬했는데 기남자란 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뛰어난 남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 정치는 사화(士禍)의 피로 물들었고 임형수는 누명을 쓰고 정미사화로 희생되고 만다. 사약을 받기 전, 임형수는 부모님께 고별인사를 올리고 아이들에게 “나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과거를 보지 말아라.”라고 한 뒤 1547년 (명종 2년)9월 15일 34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퇴계 이황은 임형수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아 어쩌면 林士遂(林公의 字)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울부짖었다 한다. 광산구 내동마을에는 임형수를 기리는 사우 등림사가 세워져 있다.

등림사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 내등마을에 있는 사당. 조선 중기의 문신 임형수(林亨秀, 1514~1547)를 주벽으로 임식(林植, 1539~1589), 임회(林檜, ?~1624)를 제향하고 있다.

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년(명종 2년) 괴벽서사건(怪壁書事件)으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 이 사건은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나라정치를 마음대로하고 이기(李賠)등이 권세를 잡고 국정을 그르쳐서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서가 발견되어 을사사옥(乙巳士獄)의 뿌리가 남아있는 증거라 하여 그 남은 무리로 지목되는 임형수(林亨秀) 등을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린 사건이다.

기본정보
소재지
광주 광산구 등임동 3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