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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득채(鄭得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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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민
해광 송제민 (1549∼1602)
송제민은 1549년(명종 4년) 12월 26일 구 광산군 극락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송정황(宋廷篁)으로 성품이 곧고 학문과 경세에 밝아 세상의 그릇됨을 보고는 그냥 넘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곧은 성품은 당시 실세였던 윤원형의 눈 밖에 나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 충격으로 송제민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산천을 떠돌아다녔는데 그러던 중 한산에 숨어 사는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을 만난다.
그리고 충청도에 사는 조헌을 만나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서 ‘세한계(歲寒契)’라는 선비의 모임을 만들어 국정을 바로잡아 주기를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무안으로 내려갔다.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니며 이때 그는 호를 해광으로 지었는데 ‘해광(海狂)’은 바다에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양산룡, 양산숙과 함께 나주의 김천일을 찾아가 거병을 하였고 호남의병들을 모으는 격문을 썼다. 그러나 형제처럼 지냈던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고 의병장 김천일마저 진주성에서 순절하자 해광 송제민은 시름을 안고 광주 무등산에 오른다. 그러나 잠자고 있을 수 만은 없었던 해광 송제민은 1593년 송제민은 김덕령을 찾아가 기병할 것을 권하였고 김덕령이 그에 따르기로 결심을 굳히자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오고 병기를 만들어주는 등 출정의 차비를 돕는 한편 도내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왜적토벌을 호소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김덕령 장군마저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사당하고, 설상가상으로 굴욕적인 강화가 시작되자 송제민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되고 만다.
해광 송제민의 비
8년간의 전란이 끝나고 다시 무안 땅으로 돌아가서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를 죄인이라 자처하며 숨어 살다가 1602년 2월 27일 54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뒷날 정조는 송제민의 애국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사헌부 지평을 추증했고 이 고장 유림들은 운암서원을 지어 제사 지내고 있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구 광산군 극락면 운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