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선거이
선거이지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리가 돈독하여 친하여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여 ‘친친(親親)’이라 불렸으며, 이를 호로 삼았다. 지략이 뛰어났으며 병법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 등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가 왜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진도군수로 있으면서 전라 좌수영(左水營)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과 함께 한산도대첩에 참여하여 왜군을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1592년 12월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593년 1월에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함께 오산의 독산산성에서 왜군을 공격해 경기도 일대를 탈환하였다. 1593년 2월에는 권율과 군대를 나누어 금주산과 행주산에 진을 쌓고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행주대첩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41년(순조1년)에 조정에서는 현재 광산구 도산동에 사우(祠宇)를 세웠으며 1862년(철종13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가증(加贈)하였다. 송정동과 도산동에는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