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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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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용

난세에 맞선 충신 집안의 명신, 양만용

  • 광주 광산구 박호동 5

양응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가 양팽손이다. 양만용은 1598년(선조 31년) 3월 24일 광산구 어룡동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해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촉망을 독차지했다. 양만용은 열 살이 되던 해 스승을 찾아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들어섰는데 스승 강항은 양만용의 가르침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양만용은 글 공부를 마치고 대사성을 지낸 학자 남곽 박동설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의 성리학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1633년(이조 11년)에 과거에 들어 한림을 제수받았고 이듬해에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설서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후금(後金: 뒷날의 청나라)에 대한 공물을 바치고 있었는데 양만용은 그러한 조정의 나약성을 지적하고 오량캐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예우를 중지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벼슬을 내놓고 냑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양만용이 서울을 떠나 고향에 도착하기 전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양만용은 의병을 모아 결의하고 나섰으나 인조 임금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조정의 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 양만용은 청주에서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통곡을 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 뒤 양만용은 관폐를 없애는데 전력하면서 빈민구제에 힘쓰다가 54세로 서거하였다.

양만용은 군수·현감 등 외직과 수찬(修撰)·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 등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제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다.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저서로는 오재집이 남아있다.

기본정보
소재지
광주 광산구 박호동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