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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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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애국충절로 왜적과 맞서 싸운 한말의병장, 이기손

  • 광주 광산구 신촌동 산95

한말 의병장 이기손 (1879∼1957)

을사조약 체결 후 광산·나주 일대에서 항일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과 교전했다. 용진산 전투에서는 일본군 200명을 사살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만주와 러시아로 망명하였다가 후일 돌아와 항일 교육에 힘썼다. 일찍이 한학을 익혔고, 20세 때는 역리와 천문·지리에도 통달하였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분노 그 자체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비롯해 을사조약, 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이기손은 광산, 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 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 그 뒤 광산, 나주, 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또 1908년 2월 용진산 전투에서는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도 적군을 물리쳤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곳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을 다니며 전투를 벌였다.

송정공원에 자리한 이기손 장군 의적비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해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그 뒤에도 결사항쟁을 전개하다가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는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는 도중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그의 호쾌하고 용맹했던 전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기손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의적비가 송정공원에 세워져있다.

용진산 정기받아 님이 나셨고
구국의 횃불들고 일어나신 곳 함성도 드높았다
그날의 함성 빛나는 오십회의 빛난 전공에
날뛰던 왜적들도 넋을 잃었네
장군의 애국충절 같구나 의적비 세운 곳에 영령 계시니
오가는 길손들이 머리숙이네

기본정보
소재지
광주 광산구 신촌동 산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