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오상열
본관은 나주. 호는 의재(義齋)이며 1878년(고종 16) 1月 光山郡 명도동(明道洞) 대명마을에서 덕(德)이 있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 오영근(吳永根)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커서 국운이 기울고 일본의 압박과 침략이 더해지는 것을 분히 여겨 일본과 싸워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때마침 막내삼촌인 오용근(吳用根)이 무관(武官)을 뽑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용됨을 계기로 그곳에 있는 영사재(永思齋)에서 무예(武藝)를 닦는 한편 화약(火藥) 등의 무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1906年 10月부터 무력(武力) 항일전선(抗日戰線)에 뛰어들었다. 그 뛰어난 무예와 높은 기절(氣節)이 당시의 의병장(義兵將)인 기삼연(奇參衍), 김태원(金泰元), 오성술(吳成述) 등에게 인정되어 도통장(都統將)으로 추천되었다. 그래서 그해 10月 15日에 千步대(소총의 일종 그당시의 소총으로는 최신형으로 사정거리가 千걸음이 된다는데서 그렇게 불리웠다.)를 들고 출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한수를 부인배씨에게 남겼다.
吾生未可必 내 삶을 기필하기 어려우니
須護腹中兒 모름지기 뱃속에 아이를 잘 보호 하시요.
不恨死當死 마땅한 죽음에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親年六十餘 부모님 연세 예순이 넘으시니 그것만이 마음 걸리네
公은 평소에도 그 매형인 염천수(廉天洙)와의 대화에서 늘 이런 외세의 압제와 괴로움을 받는 세상에 살기가 부끄럽다고 말해왔다고 한다. 그는 조여오는 일본(日本)의 압박과 억누름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늙은 아버지와 젊은 부인(婦人)만을 남겨두고 항일(抗日) 순사의 장도(壯途)에 올라 그 아우 등과 함평, 나주, 광주, 담양 등지를 옮겨다니며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고 1908年 2月 담양군 창평면 무동촌에서 왜장 길전(吉田) 소좌를 비롯 수십명의 왜병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빼앗은 소총, 큰칼, 망원경 등 무기를 뒷날 고향마을에서 전시(展示)한 바 있었는데 처음보는 신식무기에 모두가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뒤 어등산 서편 박메마을 근처에서 적대군(敵大軍)을 만나 접전중 김태원(金泰元)이 중상을 입으니 힘이 장사인 오공(吳公)은 한손에 천보(千歲)대(소총)을 들고 남은 한손으로 金장군을 부축하고 등림마을로 가는도중 김태원(金泰元) 장군은 죽었고 그 아우 김율(金律)은 붙잡혀서 光州로 압송되어 갖은 잔인한 고문으로 인해 옥사를 했다. 이렇듯 전세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자 公은 살아남은 병사를 주워모아 김수용(金垂鏞)부대와 합세 본량면(本良面) 석문산에서 적과 만나 이를 격파하고 임곡면 사호치에서 적 대군을 만나 하루밤 낮을 죽기살기로 싸웠는데 때는 일년중 가장 추운 음력 섣달. 퍼붓는 눈바람속에 적병 수십명을 살상하였으나 병기(兵器)의 뒤떨어짐과 수의 부족으로 우리 진영이 무너지자 公은 분함을 못이겨 ‘나를 쏘아라-’고 외치며 선두에서서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끝내 적의 흉탄에 맞아 1908年 12月 23日 나라잃은 아픔을 안은채 서른살 꽃다운 젊은 나이로 나라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공이 전사한 그날밤에 세살난 유복자 정교(正敎)가 천륜(天倫)이 시켜서 한 일인지 밤새 보채울다가 다음날 에야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상황(狀況)이 끝난 3일후 오씨문중 친족과 공의 우인(友人)들이 공의 시신을 거적에 싸서 장사하였는데 그 일대에 적병의 시체가 수없이 많이 흩어져 있어 그날의 치열한 싸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다. 그 다음해 1909年 倭의 우리 항일(抗日) 열사(烈士) 가족에 대한 박해(迫害)가 더해져 公의 가족에도 그 독아(毒牙)가 뻗쳐 왜놈 헌병이 집에 몰려와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는 裴氏부인을 발로 차고 칼로 때려 유혈(流血)이 낭자하고 피를 토하고 기절하였다. 그것을 목격한 네살짜라 유복자 正敎는 겁에 질려 까무라쳐서 부엌불에 화상을 입었는데 그 흉터가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왜놈 헌병들은 그러고도 모자라 온 가족을 몰살한다는 엄포에 60당년의 늙은 아버지는 외가로 피신하고 부인 배씨(裵氏)는 아들을 등에 업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1911年에 집으로 돌아와 집안이 당한 참혹한 재앙에 상심하여 안맹(眼盲 : 봉사)가 된 늙은 시아버님 모시고 모처럼 3人 가족이 함께 살게되었으나 裴씨 부인은 그때 당한 고문의 여독(余毒)으로 심한 부종(浮腫 : 몸이 붓는 병)을 앓다가 40세의 젊은 나이로 한맺힌 이승을 떴다. 그 얼마후 안맹(眼盲)의 시아버지도 증손자 오종주(吳鍾柱)의 극진한 효양(孝養)을 받다가 팔순(八旬) 고령(高齡)의 타고난 수명을 마쳤다. 단 하나있는 아들 오정교(吳正敎)는 혈혈단신 어려운 생애(生涯)를 살면서 슬하(膝下)는 매우 번성(繁盛)하여 여섯아들을 두었다.
부기(附記) 公의 막내삼촌, 조선조(朝鮮朝) 말살헌부감찰(末司憲府監察(正六品)을 지낸 오용근(吳用根) 公은 그 당시는 드문 총포(銃砲)를 만드는 기술자(技術者)로서 국운(國運)이 기울고 왜(倭)의 강정(强占)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의병(義兵)을 일으킬것을 준비하더중 끝내 합방(合邦)의 슬픔을 맞자 의병(義兵)들에게 화약(火藥)과 총(銃)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등 배후(背後)에서 그 활동을 크게 도왔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주 광산구 송산동 4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