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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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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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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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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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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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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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자치
- 정세운
박용철
박용철은 1904년 6월 21일 광산구 송정읍 솔머리 마을에서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셈을 잘하였고 한문의 사자소학의 범절을 외우는 등 일찍이 천재성을 드러냈다. 그는 마을에 있는 서당(書堂:글방)엘 다니다가 이지방의 명문(名門)인 광주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서중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서울 배재고등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청산학원(東京靑山學院)을 나왔다.
용아가 배재고교를 다닐 때의 일이었다. 시험(考査)때도 밤 늦게까지 삼국지나 시, 소설만 읽고 있었는데도 성적은 늘 우등을 차지했고 그 중에도 수학에 뛰어나 그의 질문에는 담임교사도 항상 당황했다고 한다. 용아는 항시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학생으로 고교시절에는 허가나 승인 없이 숨어서 발행하는 지하신문을 발간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용아 박용철은 일본을 배척하는 운동을 계속하다가 3.1운동이 끝난 뒤 나머지 졸업을 얼마 안두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동경 청산학원 4학년에 편입, 그 학교에 재학 중인 김영랑(金永郞)을 알게 되었고 일본 유학을 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동포 유학생들을 돌보았다.
학우들의 학비를 대주고 자비로 문학잡지를 간행하였으며 김영랑, 정지용 두 학우의 시집을 발간해주는 온정도 베풀었다.
용아는 동경 외국어학교에 합격한 때부터 본격적인 문학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23년 9월에 귀국하여 강진에 묻혀사는 옛 학우 김영랑과 왕래하면서 문학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1930년에 다시 서울로 옮겨 정지용과 함께 시문학이란 잡지를 만들어내어 우리나라 초창기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들때 곧 잘 노래를 부르고 가야금을 뜯는 멋과 재주를 어울러 갖춘 애국시인(愛國詩人)이었다. 그의 활동은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기타 여러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꾸준히 문학 활동을 해오던 그는 1938년 5월 12일 34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시인 박용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가수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를 들으면 ‘아하~ 그 노래!’ 할 것이다. 맞다. 가수 김수철이 부른 ‘나도야 간다’는 용아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를 인용하여 곡을 붙인 노래이다.
‘떠나가는 배’를 통해서 당시 일제강점기에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뇌하며 절망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용아 박용철의 의지를 엿 볼 수 있다. 박용철은 16세에 첫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때 결혼한 시골처녀와는 정이 없었는지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결국 둘은 합의 이혼을 하게 되고 박용철은 다음해에 여동생의 친구와 재혼하게 된다. 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재혼 후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문학에 전념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용철은 ‘시문학’을 발간하며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를 비롯하여 ‘싸늘한 이마’, ‘비 내리는 밤’,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시 뿐만 아니라 비평, 번역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지만 끝내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3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박용철 시인이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시인들에 비해서 덜 알려진 것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병사함으로써 살아생전에 개인 작품집을 내지 못했으며, 초기에 많은 시를 발표한 것과는 달리 이후로는 출판이나 시와 희곡의 번역, 평론 등의 활동으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용아 박용철의 시 또한 사람들의 가슴을 꽃피울 이 땅에 뿌려지는 아름다운 씨앗이 될 것이다.
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대일 언더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주 광산구 소촌로46번길 24
위치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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