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박광후
안촌 박광후는 효종, 숙종 때의 선비로 서른의 나이에 성균진사에 합격하여 당시의 여러 선비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고 조금도 불의에도 굴하지 않은 투철한 선비였다. 명성에 비하여 상세한 문헌자료가 많지 않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볼 때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이 높고 밝아 호남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쟁쟁한 남도의 학자들이 학통을 계승하게 하고 빛내어 후세에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을사사화로 우암 선생이 유배를 당하자 안촌 선생은 광주, 나주, 장성의 유생들과 연대하여 스승의 구명운동을 펼치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678년 12월15일 안촌 선생은 42세 장년의 나이로 안청동 외성당에서 작고했다. 이때 우암 선생은 안촌 박광후의 부음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묘비문을 작성하였다. 비문 끝에는 안촌 박광후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남겼다.
"아아 사술, 그 모습은 늠름했고 그 언동은 강직했다. 그리고 행실은 떳떳했고 그 의지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성현(聖賢)의 가르침과 학문수행에 힘써 나가다 중도에 꺾이고 말았으니 천도(天道)가 망망하구나 아아 사술이여, 그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어도 그 투철한 선비정신은 영구토록 빛나리라.“
기본정보
- 소재지
- 비아 도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