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박노술
항일선비 박노술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 출생으로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석음선생은 안청동에서 태어나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선비로 서기 1895년 을미사변 때 송사선생의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에 많은 감동과 호응을 일으켰던 선생의 격서가 존화록과 석음유고 등에 전해온다. 1905년의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 경술년에 우리의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은 합병조약을 강요하는 등 거듭되는 조국의 비운을 통곡하기도 하였다. 조국의 울분과 비통함을 달래기 위해 문인들 동지들과의 강론을 통하여 항일구국정신의 선양에 힘을 다했다. 일본관헌의 탄압이 시작되었지만 선생의 의지는 누구도 꺾지 못했다. 1917년 6월 광주경찰서에 구인 되어간 박노술은 사흘 만에 의식이 끊어진 몸으로 가마에 실려서 돌아와 67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죽음 한 달 전, 그는 아들에게 "마을앞산 비룡대 위에 조선 삼천리를 뜻하는 삼층석탑을 세우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말대로 현재 광산구 안청공원에는 삼층 석대인 풍천대가 남아있다. 풍천대는 박노술 선생을 기념하는 것으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조국 삼천리강토가 왜적에게 짓밟혀 일조에 생지옥이 되고 말았으나 오직 나라를 구하고 주권을 되찾을 우리의 애국정신만은 저 바윗돌처럼 굳세고 단단하고 변함없이 지켜나가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산구 안청동 7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