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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관(奇彦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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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관(奇彦觀)

기언관의 자는 백첨(伯瞻), 호는 국천재(菊泉齋), 본관은 행주(幸州)다. 고룡면 두동(현재 광산구 두정동)에서 태어났다. 사진은 고봉 기대승이 수양하며 공부하던 암자이자 기언관이 중수했다고 알려지는 귀전암 터.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 광산구 두정동 출생(고룡면 두동)

기언관(奇彦觀, 1706~1784)의 자는 백첨(伯瞻), 호는 국천재(菊泉齋), 본관은 행주(幸州)다. 아버지 기정후(奇挺後)와 어머니 나주인(羅州人) 나천추(羅天樞)의 딸 사이에, 고룡면 두동(현재 광산구 두정동)에서 태어났다. 기언관은 민세로(閔世魯)의 딸과 혼인했다. 그의 시 중에서 ‘두동 민씨어른의 죽음을 애도하다(輓斗洞閔丈)’라는 만사에 “향정에서 남전의 향약을 제정하니(鄕亭制以藍田約), 강안 또한 백록동규를 의거했네(講案亦依白鹿規)”라고 한 것으로 보아 두동마을은 이미 향약이 시행되고 있어서 풍속이 순화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기언관은 1744년(영조 20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해 5월 예문관검열을 채용하기 위해 임금 앞에서 보는 시험인 소시(召試)를 행할 때, 영조가 명현자손이라 하여 2점을 더해주어 선발에 참여하게 하였지만, 상례(常例)가 아니라고 하여 소시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1746년 1월에야 방면되어 돌아왔다. 그는 1768년에야 헌납(獻納)에 제수되었으며, 1780년에 사간에 제수되고 돈녕부 도정에 발탁되자 자격이 없다며 사직상소를 올렸고, 1783년에 호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동생인 나와(懶窩) 기언정(奇彦鼎, 1716~1797)이 1769년에 형을 위해 지은 ‘국천정사기(菊泉精舍記)’가 있는데, 형의 벼슬길이 막힌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형이 염치를 지키고 거취를 깨끗이 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기본정보
소재지
광산구 두정동 출생(고룡면 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