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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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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한말 활약했던 호남의병 가운데 형제 의병장이다. 무등산, 낭월산, 어등산 등지에서 일 군경과 교전을 벌였다. 김태원 순국 후 선암장에서 조경환을 만난 뒤 형제가 조경환 부대에서 활약했다.

호남의병 가운데 부자(父子) 또는 형제(兄弟) 의병장이 상당히 있다. 김원국과 김원범은 형제의병장이다. 김원국(元國·元局, 1873~1910) 의병장의 본명은 창섭(昌燮)이며 호는 석포(石浦)다. 무등산에서 300여명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동생인 원범(元範, 1886~1909)은 형이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이 부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7년 기삼연, 김태원 부대와 합진하게 되자, 김원국은 김태원 부대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창평 무동촌 전투를 시작으로 장성 낭월산, 영광 토산, 광주 어등산 등지에서 일경과 교전했다. 김태원 순국 후 개별 의병활동을 펼치다 1908년 9월 선암장에서 조경환을 만난 뒤 조경환 의병장 부대의 선봉장이 되었다. 당시 동생 김원범은 이미 조경환 부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김원국은 나주향교에 격문을 보내 형제가 의병을 일으킨 뜻을 알렸다. 또 일본이 장악한 광주세무서에도 ‘세금을 강제로 거두지 말라’는 내용을 담은 통지를 보내기도 했다. 더불어 일본에게 아부하는 친일파와 일진회원, 밀정들을 처단하겠다고 경고했다. 김원국은 1909년 5월 19일 불갑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 중에 붙잡혔는데,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총살, 순국했다. 36세의 나이였다. 동생 김원범은 1909년 무등산 전투에서 적과 교전 중 붙잡혀 광주수비대에게 취조받다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결했다. 23세였다. 형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나 김원범은 시신을 찾지 못했다. 정부는 1963년과 1968년 형제에게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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