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김창환(金昌煥)
임방울의 외삼촌으로 알려진 김창환은 1854년 나주(현재 광산구 삼도동)에서 태어나 1927년 사망했다. 삼도동 노안삼도로 도로변에는 김창환 동상이 세워져 그의 발자취를 기리고 있다.
임방울의 외삼촌으로 알려진 김창환은 1854년 나주(현재 광산구 삼도동)에서 태어나 1927년 사망했다. 서편제 명창인 정창업에게 소리를 배웠고 신채효 지도로 서편재 명창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날치와 박기홍 등 당대의 명창과 이종간이며 소리도 잘했지만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해 좌중을 압도했다. 1908년 창극공연을 하는 사설극장 ‘원각사’가 설립되자 주석(主席)으로 활약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議官) 벼슬을 제수받았다. 원각사가 폐쇄되자 전라도 출신 명인, 명창을 규합해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순회공연을 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협률사를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고종이 죽자 고향집에 사당을 신축해 고종의 사진을 모시고 후진을 양성하다 죽었다.
정노식(鄭魯湜)은 『조선창극사』에서 김창환을 당대 최고의 서편제 명창으로 평가했다. “이조(李朝) 고순(高純) 양대간(兩代間)에 재(在)하여 이날치(李捺致) 후로 서파 법통을 독봉(獨奉)하다시피 일세를 진동(振動)한 명창이다. 제작(製作)도 능하거니와 ‘제스처’가 창보다 더욱 능하다. 잘난 풍채(風采)로 우왕좌래(右往左來)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모두 미묘치 아니한 것이 없다. 미인의 일빈(一嚬) 일소(一笑)가 사람의 정신을 황홀케 함과 흡사하여 창과 극이 마조 떨어지는 데에는 감탄을 발치 아니할 수 없다. 각종 고전가(古典歌)에 정통한 것과 전인(前人)의 법제(法制)에 견문이 많은 것은 또한 드물게 보는 바이다. 근대 사계(斯界)에 일대가로 허(許)함이 넉넉하다.”
김창환은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과 더불어 판소리 5대 명창으로 꼽히지만 다른 명창에 비해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취입한 음반 가운데 흥보가 ‘중타령’, ‘제비노정기’는 최고 더늠으로 꼽힌다. 또 춘향가 ‘과거장’과 ‘농부가’, 성주풀이 등이 음반으로 남아 있는데, 서편제 특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농부가는 김창환이 춘향전 삽입가요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전라도 농부가가 알려졌다. 나주평야에서 연행되던 농부가의 가락을 창극에 맞게 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광산구 삼도동 노안삼도로 도로변에는 김창환 동상이 세워져 그의 발자취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