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김태순(金泰淳)
김태순(金泰淳, 1832~1889)은 자가 신여(信汝), 호는 백봉(白峰), 본관은 김해다.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침산마을에 거주했다. 1862년 봄부터 1889년 5월까지 중요한 사건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당시의 이상기후와 전염병 등이 적혀있다.
- 동곡동 침산마을 거주
김태순(金泰淳, 1832~1889)은 자가 신여(信汝), 호는 백봉(白峰), 본관은 김해이다. 아버지는 김상열(金尙烈, 1798~1869), 어머니는 제주양씨 양석원(梁錫源) 딸이다. 광주목 동각 침산마을에서 살았으며, 사촌형 김찬순(金燦淳)과 함께 노사 기정진(奇正鎭)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태순은 1862년 봄부터 1889년 5월, 사망하기 전까지 비교적 중요한 사건을 일기에 기록했다. 민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섭정하며, 당백전을 사용하다가 폐지하거나, 두루마기 소매를 좁게 해 입도록 하는 국가적인 큰 사건도 간간이 들어있다. 하지만, 농사짓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를 생생히 기록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즉 목가적인 농촌이 아니라, 흉년과 전염병을 이겨내야만 하는 처절한 농촌의 풍경이 서술되어 있다.
재해와 관청에서 세금을 감면하고 재해민을 구호하는 일 등을 소상히 적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향촌에서 집강(執綱)과 같은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간간이 과거시험에 대한 일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다른 선비들처럼 과거공부를 기본으로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기의 주요 내용을 보면, 1876년 광주에 큰 흉년이 들었고 그 여파가 이듬해에 곧장 나타났다. 1877년 1월 15일 일기에서는 “여식을 팔아서 먹고사는 자가 있고, 혹은 젖먹이를 버리고 시집가는 여자도 있었다. 들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있는데 의복을 벗겨가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이 내가 목격한 것이다. 어찌 한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산에 올라가 송피를 벗겨서 먹으니, 만산의 소나무가 껍질이 벗긴 채 뼈대만 서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흰옷을 입은 사람이 빙 둘러서 있는 것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1879년 3월에는 지진이 여러 차례 났고, 1886년에는 괴질이 번졌다. 1888년에는 대흉년이었다.
기본정보
- 소재지
- 동곡동 침산마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