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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석(柳寅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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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석(柳寅奭)

류인석(柳寅奭, 1859~1931)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다. 서산공 자미(自湄)의 15세손이다. 1957년 류인석이 거처하던 산서재에 사우를 지어 대산사라 이름짓고 면암 최익현과 함께 배향했다.

  • 대산사 : 광산구 대야길 20-17(대산동 335)

류인석(柳寅奭, 1859~1931)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다. 서산공 자미(自湄)의 15세손이다. 아버지는 류하영(柳河永), 어머니는 파주염씨 재묵(在黙)의 딸이다. 1859년 동호동 신촌(莘村)마을에서 태어나 잠시 담양 대치로 이거했으나 삼도면에서 살다가 193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 대곡 김석구(金錫龜, 1835∼1885)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8년에는 청양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사생의 예를 갖췄고, 1899년에는 송병선을 찾았다. 문집 수당유고에는 최익현, 송병선, 기우만 선생 등에게 보낸 서간이 다수 실려 있어 그의 교유와 학문이력을 짐작하게 한다. 오준선(吳駿善), 오계수(吳繼洙), 정경원(鄭經源), 이병수(李炳壽)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

경술국치가 되자 거처 뒷산 양지바른 곳에 작은 집을 지어 ‘산서재(山棲齋)’라 하고 세상에 뜻을 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73세로 세상을 뜨니 문인과 지역 유림이 존심계를 창설해 기금을 모아 1957년 류인석이 거처하던 산서재에 사우를 지어 대산사라 이름짓고 면암을 주벽으로 모시고 함께 배향해 매년 봄 향사하고 있다. 세상을 뜨기 전인 1918년에는 제족과 협력해 신촌마을에 충현각(忠賢閣)을 지어 선조인 서산 류자미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기본정보
소재지
대산사 : 광산구 대야길 20-17(대산동 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