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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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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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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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범세동(范世東)
범세동은 정몽주 제자로 공민왕때 과거에 급제한 후 덕령부윤, 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새 왕조가 들어서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덕림동에 묘소가 있는데 광주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 범세동선생묘 : 덕림동 산 94-1
범 씨는 약 2700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범가둔(范家屯)’이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약 1000년 전 북송에서는 범 질, 범중규, 범순인, 범성대 등이 학자 및 화가 등으로 활동했다. 우리나라 범 씨의 시조 시랑공 범승조는 원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이었다. 원나라 순제 말엽에 계국공주(薊國公主)가 고려로 출가하면서 공주를 보위하기 위해 고려로 나오게 되었다. 범승조는 범려(范蠡)의 후예이며 현재의 나주, 진해현에서 살았다. 증손자인 범세동(范世東, 생몰년 미상)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다.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 공민왕 18년(1369년)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윤(德寧府尹),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나 새 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을 떠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두문동에 불이 나자 살아남은 충신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범세동은 고향(현재 광산구 덕림동)으로 내려왔다.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어주었지만 거부하고 스스로를 복애(伏崖)라 하고 동네이름을 복암(伏岩)이라 부르며 성리학의 근원을 공부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복애는 ‘벼랑에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다’는 의미다. 저서로는 도학과 충절을 지킨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와 학문의 친구인 원천석과 함께 편찬한 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이 있다. 특히 갑골문 ‘천부경(天符經)’을 주해한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로 평가받는다. 세상을 떠난 뒤인 순조 24년(1824년)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기본정보
- 소재지
- 범세동선생묘 : 덕림동 산 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