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송복동(宋福東)
광주시 무형문화재 탱화장이었던 송복동은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 구암사로 출가해 탱화를 익히기 시작했다. 결혼하며 광주 송정동으로 이주했으며 백양사, 화엄사, 대흥사, 증심사 등에 4백점이 넘는 탱화를 그렸다. 사진은 1987년 12월 송복동 탱화장 모습.
- 광산구 운수동 거주
탱화장 송복동(宋福東, 1911~1998)은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나 4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가하자 순창군 복흥면 구암사로 출가했다. 7살 때 침을 잘못 맞아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뒤 말도 잃었다. 구암사에서 당대 탱화의 거장으로 이름난 금어 박석초와 인연을 맺고 15세부터 탱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백양사에서 구도를 닦다 40세가 되던 해 보살의 중매로 은경순과 결혼하며 광주 송정동으로 이주 후 가정을 꾸렸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송정리에 가족을 남겨둔 채 구암사로 돌아가 지내다 60세가 넘어 다시 송정으로 돌아와 말년을 맞았다. 송정동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탱화작업을 계속했는데, 이때 큰 아들 송광무에게 전수했다.
묵언수행하듯 평생 불화를 그린 송복동은 1985년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세상을 떠나며 지정 해제되었다. 백양사, 화엄사, 대흥사, 증심사, 불갑사 등에 그가 그린 탱화가 남아있는데, 4백여 작품이 넘는데 불화 뿐 아니라 틈틈이 불상 조각, 단청, 개금과 개채 등 불교미술 전반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80세의 고령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2시간 가량 예불과 참선을 한 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에 매달렸다고 한다. 송복동의 탱화는 부처의 표정이 풍부하고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산구 운수동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