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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택(安秉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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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택(安秉宅)

안병택은 제주 조천읍에서 태어나 장성 고산으로 이거해 기우만에게 배웠다. 동문인 이희용의 도움으로 장덕리로 옮겨와 서당을 열었다. 30년 동안 강학하며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오준선, 오계수, 고광선, 박노술 등과 교유했다. 제자들이 스승의 글을 모아 부해만고를 펴냈다.

안병택(安秉宅, 1861~1936)의 자는 처인(處仁), 호는 부해(浮海)이며,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제주도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1878년 17세 때 노사의 제자인 아버지를 따라 장성의 노사 기정진 선생을 뵈었으며, 1893년에 가산을 정리하고 장성 고산으로 이사하여 송사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애초의 입문은 노사선생의 문하였지만 노사선생이 사망한 후이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기우만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기우만은 사문(斯文)의 종주(宗主)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1896년에는 호남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의병활동을 하다가 좌절되자 장성 삼성산에 삼산재를 짓고 은둔하며 강학을 하였다. 이 삼산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시문을 남기며 뜻을 같이 했는데, 안병택은 기우만의 수제자로서 ‘삼산재 구곡시 시축’을 직접 작성하고 서문도 썼다. 또한 스승의 회갑 때는 수연시의 원운시를 직접 짓기도 하였다. 1898년에는 동문인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의 도움을 받아 광주 장덕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30년 동안을 강학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와 가깝게 지낸 벗들로는 이희용 외에도 오준선(吳駿善)과 오계수(吳繼洙), 고광선(高光善), 박노술(朴魯述) 등이 있으며, 임자도 사람들과도 특별히 친밀한 교유관계를 맺었다. 안병택으로부터 학문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도 투신하였다. 노사의 위정척사 사상이 학문과 함께 면면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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