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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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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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겸(吳謙)
오겸은 오자치의 손자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광주목사, 담양부사, 전라도관찰사를 비롯해 홍문관 교리,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1542년 가솔을 이끌고 나주로 내려왔다. 내동마을에 오겸을 모신 광산사가 있다.
- 광산사 : 광산구 송산동 837
오겸(吳謙, 1496~1582)의 자는 경부(敬夫), 호는 지족암(知足庵)·국재(菊齋)다. 오신중(吳愼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자치(吳自治)이고, 아버지는 부사(府使) 오세훈(吳世勳)이다. 어머니는 전첨(典籤) 신말평(申末平)의 딸이다. 서울 호현방에서 태어나 유우(柳藕)에게 수학하였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중종, 명종, 선조를 섬기며 남평현감, 사헌부 지평, 담양부사, 전라도 관찰사, 광주목사 등의 외직과 사헌부 지평, 장령, 홍문관 교리 등 청직을 역임했으며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542년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나주로 내려와 모친을 봉양했는데,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늘 외직을 청했다.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문을 닫고 독서에 집중해 손님이 방문해도 대부분 만나기 어려웠으며, 병이 잦아 의방을 두루 섭렵해 섭생의 이치를 깨달아 즐겁게 지내고 음식과 기거를 모두 절도에 맞게 했다. 향리에서 지낼 때는 마을사람들이 옷섶을 여미며 경의를 표했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1570년 12월 1일 실록에는 ‘오겸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는데, 중외(中外)의 직을 모두 거치며 직책을 잘 수행했고 이재(吏才)가 뛰어나 일처리가 물 흐르듯 하였다. 비록 바른 말하는 기절은 부족했으나 속으로 지키는 바가 있어, 윤원형이 정사를 어지럽히던 때 벼슬하면서도 그에게 붙지 않고 오직 근신(謹愼)하여 화를 면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신망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론(士論)이 구차하게 함께 한 잘못이 있다고 기롱하자 드디어 물러나 나주(羅州)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1580년에는 선조가 전교하기를 “재상인 오겸(吳謙), 송순(宋純)이 모두 고향으로 물러가 노년을 보내고 있는데 비록 녹봉은 주지 못하더라도 해마다 본도로 하여금 쌀과 콩을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산사 : 광산구 송산동 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