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산구 주민참여예산문화관광

모바일메뉴

광산구 자료저장소

인물

오계수(吳繼洙)

5/12
오계수(吳繼洙)

오계수는 도림(현재 광산구 도덕동)에서 태어나 오준선과 함께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했다. 의병활동을 펼쳤지만 이 시기 호남 대표 누정작가로도 꼽힌다. 지어재, 영사재, 석문정사 등에서 강학했으며, 도림사에 기정진, 오준선과 함께 배향되었다.

  • 광산구 도림하길 33(도덕동 411-4)

오계수(吳繼洙, 1843∼1915)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본관은 나주다. 오갑선(吳甲善)의 아들로, 도림(道林, 현 광산구 도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생조부인 임리재(臨履齋) 오태규(吳泰圭)에게 수학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오준선(吳駿善)과 함께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로 집안 재실인 지어재(志於齋)나 대명동(大明洞) 영사재(永思齋), 석문동 석문정사(石門精舍)에서 강학하였는데, 1895년 봄에는 원당(元堂)마을에 2칸짜리 서벽암(棲碧庵)을 짓고 머물렀다. 그는 수많은 누정에 시문을 남겨서 누정문학을 풍부하게 만들었는데, 기우만, 오준선, 고광선 등과 함께 호남 대표 누정작가라고 할 수 있다.

기정진(奇正鎭)의 학문과 위정척사사상을 이어받은 정통 제자로서 1896년 1월, 호남의병대장 기우만(奇宇萬)을 도와 광주와 나주에서 의병활동을 하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지었다. 1906년에도 비록 불발되었지만,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도모했다. 이후 의병 김준(金準, 김태원)과 전수용(全垂鏞)을 적극 도왔으며 고광순, 기삼연, 김준이 죽자 애도시를 지어 의로운 죽음을 위로하였다. 경술국치로 매천 황현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남긴 시에 차운시를 남기며 뜻을 함께 하였다. 오계수는 사후에 문인들에 의해 도림사(道林祠)에 배향되었는데, 기정진을 주벽으로 하고 오준선과 오계수가 배향된 곳이다. 오계수의 문인록에 오른 사람은 530여명이다.

기본정보
소재지
광산구 도림하길 33(도덕동 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