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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권선(吳權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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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권선(吳權善)

오권선은 나주 삼가리(현재 광산구 삼도동)에서 태어났으며 동학 대접주로 활약했다. 자는 중문(重文)인데, 광주에서 활동한 손화중, 최경선과 연대해 나주관아 점령을 위해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실패했다.

오권선(吳權善 또는 勸善)은 생몰년 미상이다. 동학 대접주(大接主)로 자는 중문(重文)이다. 당시 기록에는 ‘나주 삼가리 사람으로 원래 부랑자였으며, 고부, 장성, 완산 접전 이후 합세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호남초토사였던 나주목사 민종렬은 ‘조상 나성군(羅城君)이 나주에 봉해지고 연이어 4대가 습봉(襲封)하여 수십 세의 구묘(邱墓)가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는 영조(令祖)의 패손(悖孫)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욕심을 충족한다면 끝내 국가의 난적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나는 마땅히 모조리 토벌한 후에야 그치리라’라고 다짐했던 인물이다. 나주에 집강소를 차리고 광주에서 활동한 손화중, 최경선과 연대해 나주관아 점령을 위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민종렬이 중앙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비괴 오권선과 오석규가 수천 명의 적당을 불러모아 읍교 손병선을 붙잡아가서 총살한 뒤 시신을 불태우고 무리를 주 북창으로 옮겼다’, ‘오권선과 오석규가 비류 만여 명을 불러 모아 읍 부근의 이로면으로 쳐들어와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며 평민 10여명을 쏘아 죽이고 시골집 열 수십 곳을 불태웠다’, ‘포군 3백 명을 보내 세 갈래의 기병으로 나누어 오권선을 먼저 공격하고 포군 50명과 민병 7백여 명을 보내 응접하게 했다. 갑자기 쳐들어가 포위하고 불시에 포를 쏘아 총 맞고 즉사한 자가 353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흩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남산 앞에 당도해 몰래 엿보니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는 중이었는데, 관군이 포를 쏘며 전진하니 적도 대응했으나 크게 무너져 도망가니 가로누운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 오권선은 겨우 몸을 빼내 한 마리 노새를 타고 멀리 피하였는데, 천보대가 남산을 추격해 하촌에 이르렀으나 오권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막연하여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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