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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선(吳駿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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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선(吳駿善)

오준선의 호는 후석(後石), 자는 덕행(德行), 본관은 나주다. 지금의 광산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유년기에 백부에게 입양되었다. 용진정사를 짓고 후학을 길렀다. 정사의 오른쪽에 용진영당을 세우고 채용신이 그린 오준선의 초상화를 모셨다.

  • 용진정사 :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

조선후기 철종 연간의 유학자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의 호는 후석(後石), 자는 덕행(德行), 본관은 나주다. 지금의 광산구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유년기에 백부에게 입양되었고 18세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기우만, 고광선 등과 사귀었다. 오준선의 나이 60세이던 1910년 경술국치가 이뤄졌는데, 명망 높은 유학자였던 그에게 일본천황은 은사금(恩賜金)을 내려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오준선은 첫째, 선비는 의리와 도리가 아니면 한 가지도 남에게 받지 않는 것인데 원수의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점, 둘째 자신이 지키는 절개가 있는데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으면서 받는다면 뜻을 잃고 몸을 망치는 수렁에 빠질 것이라는 점, 셋째 망국의 유민으로서 목숨을 버리지 못했으니 단지 원통함을 참고 원한을 품어서 자정하는 의리를 지켜야 하는데 이 변치 않는 마음은 천지와 귀신이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용진정사를 짓고 후학을 길렀는데 용진정사는 옛날 용진사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절이 무너진 뒤 청안이씨 집안에서 그 터를 갖고 있다 오준선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듣고 희사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한말 호남의병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오준선이 별세한 뒤 문인들은 정사 동쪽에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채용신이 그린 오준선의 초상화를 모셨다. 좌우에는 큰 아들 오헌수와 둘째 아들 오동수 영정이 함께 있다.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며 평생 백립을 쓰고 지냈다.

기본정보
소재지
용진정사 :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