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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평(柳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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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평(柳玶)

호가정을 건립한 유사의 손자이며, 외할아버지는 임형수다. 마곡 창교리(현재 동곡동)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광주 북문 밖 공북루(이칭 절양루)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사진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제공한 1910년대 절양루 모습.

유평(柳玶, 1577~1645)의 자는 화보(和甫), 호는 송암(松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할아버지는 호가정(浩歌亭)을 경영한 설강(雪江) 유사(柳泗)이고, 외할아버지는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이며, 아버지는 유경진(柳景進)으로, 마곡(馬谷) 창교리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으며, 16살 때 충주인 박지효(朴之孝)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10년을 못살고 상처했다. 28살 때 소쇄원 양산보의 손자 양천리(梁千里)의 딸과 혼인하였다. 유평은 사계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광해군 치하에서 시국이 참담해지는 것을 보고 과거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가 인조반정 후 과거에 응시하여 47세(162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이 되어 통문을 내고 군량을 모아 출전하려고 했으나 난이 끝났음을 듣고 군사를 파하고 의곡을 영문에 바쳤다. 정묘호란 때 스승 사계 김장생이 호소사가 되자 유평도 양향유사(粮餉有司)로서 군량을 모으고 곧바로 전주로 달려가 동궁을 호종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60살의 나이로, 교서를 받들자마자 정지장군의 철의를 구해 입은 뒤 광주 절양루(折楊樓)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다음 해 1월 13일에 진군하였는데, 이때 아들 명익(明翊)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19일 여산에서 군사를 회합하였으며, 29일 공주에 이르렀지만 이미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공주에 남아있는 적병을 베고 돌아왔다. 유평의 기록은 호남모의록(湖南募義錄, 1760년), 광산거의록(光山擧義錄, 1761), 천계정묘양호거의록(天啓丁卯兩湖擧義錄, 1798), 호남병자창의록(湖南丙子倡義錄, 1762, 1798) 등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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