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유평(柳玶)
호가정을 건립한 유사의 손자이며, 외할아버지는 임형수다. 마곡 창교리(현재 동곡동)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광주 북문 밖 공북루(이칭 절양루)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사진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제공한 1910년대 절양루 모습.
유평(柳玶, 1577~1645)의 자는 화보(和甫), 호는 송암(松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할아버지는 호가정(浩歌亭)을 경영한 설강(雪江) 유사(柳泗)이고, 외할아버지는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이며, 아버지는 유경진(柳景進)으로, 마곡(馬谷) 창교리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으며, 16살 때 충주인 박지효(朴之孝)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10년을 못살고 상처했다. 28살 때 소쇄원 양산보의 손자 양천리(梁千里)의 딸과 혼인하였다. 유평은 사계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광해군 치하에서 시국이 참담해지는 것을 보고 과거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가 인조반정 후 과거에 응시하여 47세(162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이 되어 통문을 내고 군량을 모아 출전하려고 했으나 난이 끝났음을 듣고 군사를 파하고 의곡을 영문에 바쳤다. 정묘호란 때 스승 사계 김장생이 호소사가 되자 유평도 양향유사(粮餉有司)로서 군량을 모으고 곧바로 전주로 달려가 동궁을 호종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60살의 나이로, 교서를 받들자마자 정지장군의 철의를 구해 입은 뒤 광주 절양루(折楊樓)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다음 해 1월 13일에 진군하였는데, 이때 아들 명익(明翊)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19일 여산에서 군사를 회합하였으며, 29일 공주에 이르렀지만 이미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공주에 남아있는 적병을 베고 돌아왔다. 유평의 기록은 호남모의록(湖南募義錄, 1760년), 광산거의록(光山擧義錄, 1761), 천계정묘양호거의록(天啓丁卯兩湖擧義錄, 1798), 호남병자창의록(湖南丙子倡義錄, 1762, 1798) 등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