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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李景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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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李景采)

이경채는 송정리(현재 송정동)에서 태어나 비밀모임 '독서회'를 조직했으며, 일본 천황제를 비난하는 문서를 배포하다 퇴학당했다. 일본으로 유학갔다 중국 상해로 망명해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 중일전쟁이 참전했다. 2017년 송정동초등학교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 송정동초등학교(공적비) : 광산구 사암로 27번길 58(신촌동 1035)

이경채(李景采, 1910~1978)는 1910년 4월 광산군 송정리에서 이성륜(李成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1살에 송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광주고보에 진학하였고, 1927년 여름 동리 친구인 박병하(朴邴夏), 윤해병(尹海炳)과 동교생 양태성(梁泰成), 유병후(柳秉厚), 김무삼(金武三) 등과 함께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비밀모임인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1928년 4월경 이경채는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 등사판 등을 몰래 빼내 일본 천황제를 비판하는 문서를 인쇄해 광주역과 송정리역, 송정리 신사 등지에 붙였다. 이 일로 결국 권고퇴학을 당했고 학교는 다시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차별교육 문제에서 벗어나 식민지 교육체제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경채는 이후 요시찰 인물이 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검정고시를 통해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했다.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일제 검거망을 피해 일본으로 갔던 양태성, 윤창하, 유동후, 문두재 등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노선을 토론했다. 그러다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검거되며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신변위험이 커지고 유학생간 좌우대립이 심해지자 1933년 상해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는 김판수(金判守)로, 이중환(李中煥), 이일휘(李一輝)로 이름을 개명하고 인성학교 교사,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의 간행, 일본연구소 등에서 활동했다. 장백리 주선으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3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중국육군 제11사에 임시 배속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중국군 중령으로 근무하던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년 만에 귀국, 아무런 없는 경남 양산 기장면으로 옮겨 양어장을 운영하며 살다 1978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고 2017년 송정동초등학교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기본정보
소재지
송정동초등학교(공적비) : 광산구 사암로 27번길 58(신촌동 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