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철현(曺哲鉉)
-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 전유창(全有暢)
- 임상희(林相熙)
- 이병수(李炳壽)
- 이경채(李景采)
- 윤상원(尹祥源)
- 유평(柳玶)
- 오효석(吳孝錫)
- 오준선(吳駿善)
- 오성술(吳成述)
- 오권선(吳權善)
- 오계수(吳繼洙)
- 오겸(吳謙)
- 안병택(安秉宅)
- 심원표(沈遠杓)
- 송복동(宋福東)
- 범세동(范世東)
- 배동신(裵東信)
- 박해량(朴海量)
- 박치도(朴致道)
- 박정휴(朴鼎休)
- 박상현(朴尙玄)
- 박상(朴祥)
- 류인석(柳寅奭)
- 김태순(金泰淳)
- 김창환(金昌煥)
- 김준·김율(金準, 金聿)
- 김원국·김원범(元國, 元範)
- 김봉호(金鳳鎬)
- 기정룡(奇挺龍)
- 기의헌(奇義獻)
- 기언관(奇彦觀)
- 칠계 김언거
- 박노술
- 박광후
- 임방울
- 박용철
- 오상열
- 이기손
- 박광일
- 양만용
- 양산숙
- 송천 양응정
- 선거이
- 송제민
- 고봉 기대승
- 사암 박순
- 임형수
- 류사
- 오자치
- 정세운
이병수(李炳壽)
이병수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광산구가 격전지였음을 증언해주는 자료 '금성정의록'을 남긴 인물이다. 사진은 문화재청이 제공한 금성정의록 필사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병수(李炳壽, 1855~1941)의 자는 복일(福一), 호는 석전(石田)·겸산(謙山)이며,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나주 여황면 죽산리(현 광산구 삼도동)에서 태어났으며 이홍구 계자로 입적되었다. 1874년 도백일장에서 ‘석전음(石田吟)’으로 장원을 했으나 혼란한 시대상에 세상에 대한 뜻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매진했다. 39세이던 1893년 민종렬이 나주목사로 부임해 향약을 조직하고 도약소를 설치하며 직월(直月)을 맡기자 공적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상벌의 규정을 시행하는 일이었다.
이듬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민종렬이 초토사 임무를 수행하게 되자 나주를 수성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당시의 일을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에 남겼다.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며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 참여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금성정의록’은 갑편, 을편, 병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나주의 정세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했다. 1918년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로 이거해 강학활동을 했으며 1931년 다시 나주로 돌아와 금성산 아래 금곡리에 정착했다. 1936년 노안면 용산리 월송마을에 송산정사(松山精舍)를 짓고, 유도(儒道)를 강론하며 많은 문인을 양성했는데 겸산선생연원록(謙山先生淵源錄) 문인록(門人錄)에는 744명이 기록되어 있다. 서로 시를 주고받은 인물 중에서는 나주목사 민종렬을 비롯해 나윤후, 오계수, 기우만, 오준선 등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유학자의 인식이 담겨 있는 시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