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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정(曺基正)
- 조경환(曺京煥)
- 정득채(鄭得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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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환(曺京煥)
광주 북구 신안동에서 태어난 조경환은 최익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한말 의병으로 김태원 부대에서 활약하다 김태원이 순국한 뒤 의병장에 추대되어 항일전을 계속했다. 어등산 절골에 은신했다 급습한 일 헌병대에 의해 사망했다. 사진은 조경환 생가터.
- 조경환 생가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조경환(曺京煥, 1876~1909)의 호는 대천(大川), 아명은 정거(丁擧), 본명은 준환(準煥)이다. 광산군 서방면 산안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9세부터 22세까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일경은 조경환에 대해 ‘고(故) 거괴(巨魁) 김태원의 부장으로 태원의 사후 독립해서 광주군에 근거하여 각지를 횡행하였고,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심남일, 전해산 등의 거괴와 서로 도우면서 가끔 관헌과 싸웠으나 여기서 전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경환은 1907년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이 이뤄지자 광주, 함평 등지에서 이원오, 김동수, 양상기 등과 뜻을 모아 함평으로 죽봉 김태원을 찾아갔다. 그때부터 김태원 부대의 좌익장이 되었고 김태원이 순국한 뒤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광주 흑석리, 창평 무동촌, 석문산 등지에서 항일전을 지속 전개했다. 1909년 구정을 앞두고 설을 쇠고자 의병을 귀향시킨 뒤 몇 명의 의병과 어등산 절골에 은신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의 급습으로 가슴에 총격을 받고 사망에 이르렀다. 죽기 직전 품안에 간직했던 의진명단을 안간힘을 다해 불사른 후 순국했다. 박현동은 당시 용진산에서 주둔해 있던 중에 조경환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어등산으로 달려와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후 ‘눈물을 흘리며 동쪽 언덕에 서서 장렬하게 죽어간 모습을 슬피 바라보네. 절개는 눈 속의 푸른 소나무와 같고 충성은 해악(海嶽)보다 더 높았구려’라며 그의 절의와 충성심을 기리는 시를 지었다.
기본정보
- 소재지
- 조경환 생가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