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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문화재

풍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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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과거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았던 정자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칠계 김언거(金彦琚, 1503∼1584)가 지었다.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풍영정' 글자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852)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하는 강변 언덕에 위치한 정자다. 과거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았다.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칠계 김언거(金彦琚, 1503∼1584)가 지은 정자인데, 송인수가 1543년경 지은 시가 걸려있음을 볼 때 적어도 1543년에는 이미 풍영정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계진의 풍영정에서 짓다(題季珍風詠亭)’라는 송인수의 시는 풍영정의 원운시가 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나절 한가히 틈을 내 모든 일을 쉬는데, 하늘가 봄빛은 멀리 근심을 더해주네. 산은 원근으로 도화동을 에워싸고 물은 동서로 두약꽃 핀 물가를 흐르구나. 시종은 오래 비워 흔적 찾기 어렵고 임천은 아름답더라도 오래 머물 수 없는 일. 나 같은 늙은이야 귀향이 늦었다 해도 장한의 외로운 배는 가을까지 기다리지 못하리.(半日偸閒萬事休 天涯春色迥添愁 山圍遠近桃花洞 水散東西杜若洲 侍從久虛難痕迹 林泉雖美莫淹留 白頭如我歸田晩 張翰孤舟不待秋).’

이후 많은 시인묵객이나 관리 등이 이곳에 와서 차운시를 남겼는데, 위 시에 차운한 작가는 김인후, 이황, 기대승 등 200명이 넘는다. 풍영정은 현재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마루로만 된 정자에 난간이 부분만 둘러 있다. 정자 안쪽에는 70여개, 130여수의 시판과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풍영정은 갈처사가 쓴 현판과 오리 전설이 남아 있다.

갈처사는 풍영정 글씨를 써줬는데, 김언거가 수차례 방문해 겨우 글씨를 얻어 가지고 돌아오다 궁금해서 중간에 열어본 순간 ‘풍’자가 날아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갈 처사의 제자에게 날아가 버린 글자를 다시 받아 오늘 날 풍영정의 글씨가 다르다는 전설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왜장이 이곳의 정각을 모두 불태웠는데,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풍영정 글씨가 오리가 되어 날아가니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긴 왜장이 불을 꺼 풍영정이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풍영정은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 소금장수 총각과 장씨 처녀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전한다.

기본정보
지정번호
지방문화재 자료 제4호
소유자
광산김씨 문중
소재지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852)
규모
정면 4 칸, 측면 2 칸, 골기와 팔작지붕
시대
조선시대
지정일
1984-02-29
상세안내
풍영정에 얽힌 전설

임진왜란 당시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의‘풍’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올랐다.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 현재 정각에 걸린 현판의 글자를 자세히 살펴보면‘풍(風)’자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진다.

위치정보
버스노선

문흥 18, 문흥 39, 봉선 37, 상무 62, 임곡 89, 송정 98, 첨단 09, 수완 49

찾아가는 방법

광주역에서 운남동 방면 승용차로 20분 / 광신대교에서 도보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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