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진정사
한말 도학자 후석 오준선(吳駿先, 1851∼1931)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후진을 양성한 곳이자 한말 호남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문인들이 스승을 위해 의연금을 모아 1917년 완성했다.
-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
용진산 남쪽 산록에 자리잡은 용진정사는 한말 도학자 후석 오준선(吳駿先, 1851∼1931)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후진을 양성한 곳이자 한말 호남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용진정사는 후석의 문인들이 스승을 위해 학문하는 장소로 정사 한 채를 짓기로 하고 의연금을 모아 1916년 공사를 시작해 1917년 완성했다. 석문에서 강학하는 자리를 이곳으로 옮겼고 용진정사라고 명명하기 전 처음에는 석남정사라 불렀다. 3월 10일과 9월 10일 강회를 열었는데, 매년 이 날이 되면 수 백명이 몰려 왔다.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기와집으로 서쪽에 장서실이 있었는데, 면암 최익현, 전해산, 김태원, 오성술 등이 드나들며 항일전략을 협의했다.
용진정사가 들어선 자리는 한때 상원사로 불렸던 고찰 용진사가 있었으나 폐사되었다. 이 터는 청안이씨 소유였으나 오준선의 뜻을 전해 듣고 땅을 희사했다고 한다. 용진지에는 여지승람을 빌어 용진사를 일부 언급하고 있는데, 극복루(克復樓)라는 이름을 가진 누각이 있었으며 황폐화된지는 백년이라고 했다. 고려 말 정도전이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용진사에서 소요하며 중수기를 지었고 우암 송시열, 온제 박광일 등이 이곳에서 주유했다.
용진정사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용진영당이 있는데, 후석이 세상을 떠난 뒤 문인들이 모여 1939년 세운 것이다. 문은 ‘산앙문’이라 이름 지었는데, 대개 높은 산 같은 스승을 우러른다는 의미다. 후석 영정을 주벽에, 큰 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 영정을 좌우벽에 모셨다. 후석의 영정은 화공 채용신의 작품이다. 1924년 그려진 후석 영정은 고종황제를 위해 거상하는 백립을 쓰고 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채용신은 영정 뿐 아니라 용진정사 지도도 남겼다. 용진정사는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본정보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자료 제7호
- 소유자
- 후석 오준선선생 유적보존회
- 소재지
-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
- 규모
- 정사 4 칸, 영당 3 칸
- 시대
- 1917년
- 지정일
- 1985-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