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부 광산김씨정려
- 평택임씨삼강유허비
- 효자 정계흥지려
- 오효열정문(五孝烈旌門)
- 의령남씨·광산김씨 정려각
- 옥동 3층 석탑
- 선암사지 3층 석탑
- 충현각(忠賢閣)
- 지어재(志於齋)
- 율수재(聿修齋)
- 오성재(五星齋)
- 귀후재(歸厚齋)
- 경장각(敬章閣)
- 경모재(敬慕齋)
- 경모재(敬慕齋)
- 진천사(眞泉祠)
- 신호사(莘湖祠)
- 등임사(登臨祠)
- 대산사(大山祠)
- 후암정(後岩亭) 터
- 후주정(後洲亭) 터
- 호은정(湖隱亭)
- 낙암정(樂庵亭)
- 송음정(松陰亭)
- 외성당(畏省堂)
- 관수정(觀水亭)
- 유애서원(遺愛書院)
- 용아시비
- 석재연자방아
- 죽산박씨 대종가
- 오상열 의병장 묘역
- 후석 오준선 묘역
- 고봉 묘역
- 오상열 의병장 순절기적비
- 박현동 의병 표성비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 전적지
- 국창임방울 노래비
- 민목사불망비
- 용마바위
- 이기손 의병장 의적비
- 김해김씨 효열비
- 시기재(始基齋)
- 두남재(斗南齋)
- 봉강재(鳳崗齋)
- 오남재(吾南齋)
- 영사재(永思齋)
- 곡부공씨열행비
- 영광김씨효열정려
- 밀양손씨삼효려
- 광산김씨효열각
- 선거이지려(宣居怡之閭)
- 남동사(南洞祠)
- 원당영각
- 송호영당
- 불환정(不換亭)
- 칠송정(七松亭)
- 가학정(駕鶴亭)
- 도림사(道林祠)
- 동호사(東湖祠)
- 대동사(大東祠)
- 대명사(大明祠)
- 화암사(花巖祠)
- 광산사(廣山祠)
- 학림정사(鶴林精舍)
- 송산동 미륵불
- 양림사 부도
- 동촌마을 입석
- 세동마을 입석
외성당(畏省堂)
박광후가 지은 당으로 송시열이 당호를 썼다. '두려워하며 살피라'는 의미의 외성(畏省)은 당시 서양문물 도입으로 인해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는 세태를 빗댄 것이다.
- 현재 없음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안촌 박광후(朴光後, 1637~1678)가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0년대 사라지고 없지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박 사술이 죽은 지 이미 해를 넘겼다. 봉산(귀양지)에서 정담을 나누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코가 시큰해지고 목이 메었다. 이번 행차에 그의 옛집을 지나니 내가 써 준 ’외성당‘ 세 글자가 그대로 벽에 있는데 그의 맏아들 수여 박중회 또한 외지에 나갔다. 산양의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절구 한 수를 읊었다.(朴士述之亡 已有年矣 每念蓬山款語 爲之酸噎 今行歷過其舊居 則余所寫畏省堂三字 宛然在壁 而其胤子重繪受汝 亦出往矣 不勝山陽之感 聊賦一絶)’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외 면암 최익현도 외성당기를 남겼는데, 귀양에서 돌아오던 날 박광후 후손인 박만동(朴萬東)을 우연히 만나 그의 청으로 당기(堂記)를 썼다. ‘두려워하며 살피라’는 뜻의 외성(畏省)이라는 당 이름에 빗대어 당시 서양문물 도입으로 인해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는 세태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외성당에 대해 설명한 내용만 일부 살펴보자면, ‘광주목(光州牧) 안청리(安淸里)의 조촐한 초가에 ‘외성당(畏省堂)’이라고 편액(扁額)한 집이 있다. 이는 옛날 안촌(安村) 박공(朴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옛집으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친필로 쓴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수백 년이 지났건만, 동우(棟宇)가 탈이 없고 당의 편액도 완연하게 보존되어 이 당에 오르는 후인들을 자연스럽게 감발하고 격려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니, 선생의 덕의(德義)와 풍도(風度)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게 하는 것이 아, 영원하구나’라고 쓰고 있다. 이외에도 기우만이 쓴 외성당기도 있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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