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산구 주민참여예산문화관광

모바일메뉴

광산구 자료저장소

비지정문화재

외성당(畏省堂)

5/12
외성당(畏省堂)

박광후가 지은 당으로 송시열이 당호를 썼다. '두려워하며 살피라'는 의미의 외성(畏省)은 당시 서양문물 도입으로 인해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는 세태를 빗댄 것이다.

  • 현재 없음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안촌 박광후(朴光後, 1637~1678)가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0년대 사라지고 없지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박 사술이 죽은 지 이미 해를 넘겼다. 봉산(귀양지)에서 정담을 나누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코가 시큰해지고 목이 메었다. 이번 행차에 그의 옛집을 지나니 내가 써 준 ’외성당‘ 세 글자가 그대로 벽에 있는데 그의 맏아들 수여 박중회 또한 외지에 나갔다. 산양의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절구 한 수를 읊었다.(朴士述之亡 已有年矣 每念蓬山款語 爲之酸噎 今行歷過其舊居 則余所寫畏省堂三字 宛然在壁 而其胤子重繪受汝 亦出往矣 不勝山陽之感 聊賦一絶)’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외 면암 최익현도 외성당기를 남겼는데, 귀양에서 돌아오던 날 박광후 후손인 박만동(朴萬東)을 우연히 만나 그의 청으로 당기(堂記)를 썼다. ‘두려워하며 살피라’는 뜻의 외성(畏省)이라는 당 이름에 빗대어 당시 서양문물 도입으로 인해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는 세태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외성당에 대해 설명한 내용만 일부 살펴보자면, ‘광주목(光州牧) 안청리(安淸里)의 조촐한 초가에 ‘외성당(畏省堂)’이라고 편액(扁額)한 집이 있다. 이는 옛날 안촌(安村) 박공(朴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옛집으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이 친필로 쓴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수백 년이 지났건만, 동우(棟宇)가 탈이 없고 당의 편액도 완연하게 보존되어 이 당에 오르는 후인들을 자연스럽게 감발하고 격려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니, 선생의 덕의(德義)와 풍도(風度)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게 하는 것이 아, 영원하구나’라고 쓰고 있다. 이외에도 기우만이 쓴 외성당기도 있다.

기본정보
소재지
현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