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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정(後岩亭)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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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정(後岩亭) 터

후남 박섬동의 은둔소로 아들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1899년 건립했다. 정자 이름은 후석 오준선이 지었으나 현재 퇴락했으며 터만 남았다.

  • 진곡동 진곡마을회관 인근

하남동 진곡동 진곡마을회관 옆에 소재했던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정자다. 덧창문을 달고 재실을 갖춰 일반 가옥과 구조가 유사하며 주위가 민가로 둘러 싸여 있었다. 후암 박섬동(朴暹東)의 은둔소로 아들 노두, 노걸 두 형제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1899년 건립했는데 정자 이름은 후석 오준선이 지었다. 옛 사진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건물로 좌우 2칸이 마루였으며 마루 좌우 전면에 덧창문이 설치된 재실형태였다.

박섬동은 송변선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로 ‘후암’이라는 호는 종선조 검암 박치도의 학덕을 추모해 제2의 검암이 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때 문인들에 의해 박섬동 신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김문옥의 후암정기와 정규종의 후암기가 전해지나 현재 정자는 퇴락했다. 김문옥의 후암정기는 정자주인들의 학행과 일대의 풍치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산수(山水)의 아름다운 경치만을 위하여 정자를 짓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산수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 싫증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요, 또 자신의 안일(安逸)만을 위하여 정자를 짓는다고 한다면 안일이라는 이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다하도록 사모의 정을 부치고 또 십세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중단 없이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조를 위해 지은 정자뿐이라 할 수 없다. 광산의 진곡마을에 사는 박씨들은 옛날부터 명가로 칭해 온 훌륭한 가문이다. 문학의 유업을 이어오고 또 유문의 정통을 지켜온 지가 한 두세 뿐 아니다. 근래 이 문중에 후암처사로 불리운 섬동씨라는 선비가 있다. 일찍부터 원계(遠溪) 장덕(長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았고 또 스스로 물러나 자신의 몸을 다스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능히 가문의 학통을 이었다. 그의 종선조(從先祖)인 검암(黔巖)선생 다음가는 뛰어난 인물이 되겠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공이 몰(沒)한 20여 년 후에 그의 두 아들인 노두(魯斗), 노걸(魯傑)이 공에 대한 애모(哀慕)의 생각이 간절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부모에 대한 사모의 정이 깊다 할지라도 그의 마음이 눈과 귀의 보고 들음과 여러 사물(事物)의 유혹에 의해 때에 따라서는 이러한 정을 잊을 수 있다. 차라리 나의 선인(先人)이 평소 노니며 읊고 노래한 그곳에 나아가 한 정자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여기에 거처하며 나의 생각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 하는 뜻에서 그의 선인(先人)이 거처한 그의 유지(遺趾)에 한 정자를 짓기로 결심하였다. 시렁 위에 가득 쌓인 서책도 모두 다 그의 손때가 묻어있는 그의 시서이고 창 사이에 비친 밝은 일월도 모두 다 그가 생전에 즐긴 그의 완물이다. 솔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나 골짜기에서 울려오는 아름다운 소리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늙은 돌, 푸른 바위의 굳은 지절(志節)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대는 마우·모골·시나매·아갓골·아랫마우 등의 골짜기, 백길·가재기 등의 옛마을, 여시고개·한재 등의 고개, 백두산·왕신봉 등의 야산이 있다.’

바로 옆에는 순천박씨 박언성, 박충정, 박중항, 박성록, 박성수 등을 제향하는 재각 오성재(五星齋)가 있다.

기본정보
소재지
진곡동 진곡마을회관 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