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부 광산김씨정려
- 평택임씨삼강유허비
- 효자 정계흥지려
- 오효열정문(五孝烈旌門)
- 의령남씨·광산김씨 정려각
- 옥동 3층 석탑
- 선암사지 3층 석탑
- 충현각(忠賢閣)
- 지어재(志於齋)
- 율수재(聿修齋)
- 오성재(五星齋)
- 귀후재(歸厚齋)
- 경장각(敬章閣)
- 경모재(敬慕齋)
- 경모재(敬慕齋)
- 진천사(眞泉祠)
- 신호사(莘湖祠)
- 등임사(登臨祠)
- 대산사(大山祠)
- 후암정(後岩亭) 터
- 후주정(後洲亭) 터
- 호은정(湖隱亭)
- 낙암정(樂庵亭)
- 송음정(松陰亭)
- 외성당(畏省堂)
- 관수정(觀水亭)
- 유애서원(遺愛書院)
- 용아시비
- 석재연자방아
- 죽산박씨 대종가
- 오상열 의병장 묘역
- 후석 오준선 묘역
- 고봉 묘역
- 오상열 의병장 순절기적비
- 박현동 의병 표성비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 전적지
- 국창임방울 노래비
- 민목사불망비
- 용마바위
- 이기손 의병장 의적비
- 김해김씨 효열비
- 시기재(始基齋)
- 두남재(斗南齋)
- 봉강재(鳳崗齋)
- 오남재(吾南齋)
- 영사재(永思齋)
- 곡부공씨열행비
- 영광김씨효열정려
- 밀양손씨삼효려
- 광산김씨효열각
- 선거이지려(宣居怡之閭)
- 남동사(南洞祠)
- 원당영각
- 송호영당
- 불환정(不換亭)
- 칠송정(七松亭)
- 가학정(駕鶴亭)
- 도림사(道林祠)
- 동호사(東湖祠)
- 대동사(大東祠)
- 대명사(大明祠)
- 화암사(花巖祠)
- 광산사(廣山祠)
- 학림정사(鶴林精舍)
- 송산동 미륵불
- 양림사 부도
- 동촌마을 입석
- 세동마을 입석
오효열정문(五孝烈旌門)
송산동 송동마을에 위치한 서산류씨 정려다. 서산류씨효행려(瑞山柳氏孝行閭), 서산류씨정려(瑞山柳氏旌閭)로 알려졌으나, 현재 정려 앞에는 ‘오효열정문(五孝烈旌門)’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광산구 송산동 산 4-1
송산동 송동마을에 위치한 서산류씨 정려다. 기존 문헌에는 서산류씨효행려(瑞山柳氏孝行閭), 서산류씨정려(瑞山柳氏旌閭)로 알려졌으나, 현재 정려 앞에는 ‘오효열정문(五孝烈旌門)’이라는 비석으로 정려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정려문은 류영(柳瑛), 류현(柳玹) 형제와 그들의 처 고흥유씨, 낙안오씨, 여동생인 정성일(鄭聖一) 처 서산류씨 효행을 기리고 있다. 정유재란(광산구사에는 임진왜란으로 기록됨) 당시 류영, 류현 형제는 어머니 나주오씨를 모시고 피난 중 왜적에게 포위당하자 모친을 지키려다 함께 살해됐다. 이 상황을 숨어서 지켜보던 그들의 부인과 여동생이 뛰쳐나와 왜적에 대항하다 이들 역시 죽음을 당했다. 전란 후 1599년 나주목사 조수준의 주청으로 1615년 정려가 내려졌고, 1624년 지금의 위치에 정문이 세워졌다. 그러나 1920년 일제강점기에 일본헌병이 정려 내 현판을 떼어버렸다고 한다.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내부에는 가운데에 정려된 5위(旌閭五位) 이름을 새긴 비석 1기가 세워져 있고, 5명의 정려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에는 ‘효자 성균진사 류영지려(孝子成均進士柳瑛之閭)’, ‘효열부 성균진사 류영지처 고흥류씨지려(孝烈婦成均進士柳瑛之妻高興柳氏之閭)’, ‘효자 통덕랑 류현지려(孝子通德郞柳玹之閭)’, ‘효열부 통덕랑 류현지처 낙안오씨지려(孝烈婦通德郞柳玹之妻樂安吳氏之閭)’, ‘효녀 통덕랑 정성일지처 서산류씨지려(孝女通德郞 聖一之妻瑞山柳氏之閭)’이라고 새겨져 있다.
기본정보
- 소재지
- 광산구 송산동 산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