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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花巖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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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花巖祠)

화암사(花巖祠)는 현재 광산군 대산동 가산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사우(祠宇)이외에 숭절당(崇節當)과 화엄사묘정비 (崇節當 花嚴祠墓庭碑)가 있으며, 고려 말 이조 초, 성리학자이자 단종순절신(端宗殉절臣)인 양산(陽山) 김우생(金佑生)의 충절(忠節)과 학문(學文)을 선양흠모(宣陽欽慕)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우(祠宇)이다.

  • 광산구 삼도가산안길3-4(대산동 117)

화암사(花巖祠)는 현재 광산군 대산동 가산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우(祠宇)이외에 숭절당(崇節當)과 화엄사묘정비 (崇節當 花嚴祠墓庭碑)가 있으며, 고려 말 이조 초, 성리학자이며 단종순절신(端宗殉절臣)인 양산(陽山) 김우생(金佑生)<1372. 공민왕 21년 ~ 1457. 세조 3년>의 충절(忠節)과 학문(學文)을 선양흠모(宣陽欽慕)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우(祠宇)이다.

양산(陽山) 김우생(金佑生)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시문을 짓고 사서구경에 통달하였으며, 중형(仲兄)인 좌명공신 김덕생이 억울하게 역신(逆臣)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매, 그의 나이 28세에 순천부사직을 사직하고 광산구 삼도동 도야마을에 은거하며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시도함에 양산 김우생은 이에 가담하였으나, 단종 복위가 실패하고 정인지의 도움으로 죽임을 면한 그는 1457년 세조3년 단종이 승하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입산통곡 하다가 북향 사배 후, 그의 나이 86세에 음독 자결하였다.

양산 김우생은 세조의 등극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적들은 세상에 출판되어 나오지 못하고, 후손들은 화가 미치게 될까 두려워하여 그의 문적들을 땅을 파고 숨겼다가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찾아내어 집안에 숨겼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저택이 모두 불타게 되었으며 그의 문적 또한 소실(燒失)되어, 그의 스승인 포은 정몽주선생에게 이어받은 성리학에 대한 학통은 안타깝게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으며, 그의 이름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만다. 『가례연의(家禮衍義 )』 와 『훈몽요어(訓蒙要語)』 라는 2권의 책을 지었다 하나 이 서책 또한 실전(實傳)하지 않는다.

조선의 제22대 정조 대왕(正祖大王)은 신하 이서구(李書九)를 시켜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참형을 당하거나 순절한 신하들의 행적을 찾게 하여 일일이 수결(手決)하고 장릉사보(莊陵史補)를 편찬하고 장릉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위토록 명령함에 양산 김우생의 행적 또한 장릉사보에 오르고 비로소 신언서판(身言書判) 되자, 경향의 유림 선비들이 모여들어 1807년(순조 7년) 삼도동 도야마을에 사우(祠宇)를 짓고 사우가 위치한 산명(山名) 화암산(花巖山)의 이름을 차명(借名)하여 화암사(花巖祠)라 하였다. 양산 김우생과 그의 스승인 포은 정몽주, 단종복위를 앞장서 주도하던 연장자인 백촌 김문기 세 분의 신위(神位)를 함께 모시고 해마다 배향(配享)하며 충절과 효행을 가르치는 서원으로 자리를 잡아갔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908년(순종 2년) 대산동 가야마을에 다시 중건(重建)하여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경향의 유림이 모여들어 포은 정몽주 선생, 양산 김우생 선생, 백촌 김문기 선생의 충절을 기려온 바 그 역사 또한 200년이 넘는다.

상기 문건에 대한 참고문헌자료는 광산구청 문화정보과에 "양산 김우생 문헌자료를 통한 고증연구-연구자 김석현" 1부를 기증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본정보
소유자
상산김씨 양산공파
소재지
광산구 삼도가산안길3-4(대산동 117)
시대
1807년(순조 7년) 삼도동 도야마을에 창건, 1908년(순종 2년) 대산동 가야마을에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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