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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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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광산구의 어등산(魚登山 338m)은 무등산처럼 전국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어도 산이 지니고 있는 존재만큼은 확실하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 산32-1

광산구의 어등산(魚登山 338m)은 무등산처럼 전국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어도 산이 지니고 있는 존재만큼은 확실하다. 구한말의 어등산은 호남의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곳으로 산등성이 곳곳에는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듯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광산구의 중심에서 도시를 울타리처럼 감싸 안은 어등산은 야트막한 모습과는 달리 등성이 깊고 골짜기가 길어 구한말 의병의 전적지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어등산 일대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한말(韓末) 호남의병의 중심 근거지로 기삼연, 김태원, 김율, 전해산, 심남일, 조경환, 오성술 의병장 등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이들이 어등산에 남긴 의병정신이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광산의 상징, 어등산을 오르다

국가가 위험에 처하자 국민들은 부름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일어났다. 그리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그리고 분연히 싸웠다. 어등산 곳곳은 국가가 위험에 처한 한때, 의병정신으로 들끓었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야성적이고 푸르른 산길에서는 마치 그 시대 사람들의 기개와 숨결이 전해지는 듯 하다. 은밀하게 혹은 격렬하게 이 산길을 누볐을 의병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어등산을 올라가 보았다. 어등산 정상까지는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어 부담 없는 산행을 할 수 있다. 적막한 산길을 오르다보면 의병들의 생각으로 드는 숙연함 때문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산길에서의 분위기가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진다. 어등산의 정상인 석봉에 다다르자 광산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등산은 주위에 큰 산이 없어 장성, 나주, 함평, 광주를 조망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이 석봉은 옛날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봉우리이다. 이곳은 한말 김태원 의병장이 쌍안경으로 일본군경의 동태를 살피며 작전을 지휘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 한걸음 더 올라서서 경치를 내려다 보면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과 광활하게 펼쳐진 광산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숭고한 역사에만 취해 보이지 않았던 어등산의 시원한 자연이 청량한 느낌이다. 탁 트인 이곳에 서자 문득 어등산에서 바라보는 어등낙조(魚登落照)가 광산 8경 중 하나라는 것을 떠올렸다. 황룡강 물빛에 붉은 노을이 비치는 풍경은 얼마나 더 황홀할지 광산 8경인 어등산 모습이 왠지 궁금해진다.

사람과 가까운 곳에서 자연을 선물하고 휴식처로서의 역할도 뛰어나게 해내고 있는 어등산, 어등산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쉼터로 자리매김하였고 사람과 세월을 함께 보듬어온 광산구의 고마운 존재이다. 많은 시간동안 시대와 역사에 파헤쳐지면서도 사람을 품어왔고 앞으로도 사람을 위한 자연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그 애틋한 어등산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두고두고 생각날 듯 하다.

한말 투쟁의 무대, 어등산과 의병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해산 등 조선이 굴욕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의병들의 저항은 특히 맹렬했고 광주와 나주의 경계였던 이곳 어등산은 활발한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전국 의병의 60.4%에 달하는 4만 4000여명이 일본 군경과 1,313회의 교전(전체 47.6%)을 벌인 호남의병은 한말 의병활동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병부대가 맹위를 떨치자 일본은 일제군경을 총 동원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고, 이때부터 항일투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다양한 계층에서 새로운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호남의병을 소탕하기 위한 일본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펼쳤다. 1909년 9월 1일부터 1909년 10월 25일까지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전개되었고, 약 3년 간 일제에 맞서 1,313회 대소전투를 치르면서 호남의병은 5백여 명이 전사하고, 체포되거나 자수한 숫자는 3천 명에 달했다.

특히, 어등산에서는 1908년 4월 25일 박산마을 뒷산 석굴, 토굴에서 격전 끝에 의병장을 비롯한 23명이 전사했고, 1909년 1월 10일 운수동 절골에서 조경환 의병장 이하 30여 명이 전사, 10여 명이 체포되고, 9월 26일 80여 명이 싸우다 10명이 전사했다. 어등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의병활동은 그 후 광주학생독립운동,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신적 기반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어등산은 광주, 장성, 나주, 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 이점과 지역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지원이 있었기에 호남의병의 주된 근거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어등산의 대표적인 한말 의병장은 죽봉 김태원 장군을 꼽을 수 있다. 김태원 장군이 이끈 의병부대는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는 등 일본군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출귀몰하였다고 한다. 그는 1908년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물고기, 용이 되어 산을 오르다.

‘물고기 어(魚)’자에 ‘오를 등(登)’자를 쓰는 어등산. 이 이름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어등산 산허리에 있는 박호리 마을은 박산리와 호송리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박산마을은 송천 양응정이 이곳에 와 살기 이전에는 박실 또는 박산이라 불렀는데 박씨들이 주로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황룡강변에 박중윤이라는 사람이 양공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큰 잉어 한 마리를 그의 밥을 나눠 먹여 기르며 살았다. 하루는 박중윤이 정자에서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그가 기르던 잉어가 나타나 “판관님, 이제 제가 용이 되어 승천할 때가 되었습니다만 양공정 때문에 제 못이 좁아 승천하는데 곤란을 겪고 있으니 양공정을 헐어 제 자리를 넓혀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박판관은 이상한 꿈도 있다 싶어 정자 아래를 내려가 보았더니 기르는 잉어가 눈을 꿈벅거리며 마치 애원하듯 꼬리를 치고 있었다. 박판관은 꿈에서 잉어가 말한대로 양공정을 헐고 못을 넓혀 주었다.

며칠이 지나 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끼는 형태가 용이 하늘로 오를 징조 같아 보이자 박판관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연못으로 나가 마지막으로 잉어의 모습을 보려고 했지만 늘 보이던 잉어는 나타나지 않고 물 위로 꼬리만 몇 번 보이더니 천둥이 치는 가운데 자취를 감추었다. 이 뒤부터 천등산이라 부르던 박산마을 뒷산은 잉어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고 하여 어등산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고귀한 유산, 역사에 길이 남아 기억될 어등산

해발 338m의 어등산은 산이라기보다 멀리 보면 마치 광산구를 감싸는 거대한 병풍같은 언덕이다. 시대를 견디고 아직까지도 사람을 품어주는 참 고마운 어등산, 의병들의 전적지이기도 했던 어등산은 군부대 포사격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산등성이에 포탄이 터지고 총탄이 쏟아지면서 또 다른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또한 어등산 관광단지 조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산이 깎여져 나가는 오랜 세월 속에도 불구하고 어등산은 옛 상흔을 애써 숨긴 채 도시의 중심에서 푸르른 녹음을 만끽할 수 있는 우리의 고마운 휴식처로 남아주고 있다. 현재 어등산에서는 의병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어등산 의병의 날’이라는 기념식이 해마다 펼쳐지고 있어 후손들에게 의병들의 활약과 더불어 그들이 남긴 고귀한 의향(義香)을 전해주고 있다.

어등산 등산길
  • 1구간 : 구름길(보문고 ↔ 관광단지 : 연장 1km, 25분 소요)
  • 2구간 : 용오름길(관광단지 ↔ 등용정 : 연장 1.8km, 40분 소요)
  • 3구간 : 의병길(석봉 ↔ 등용정 ↔ 황새봉 : 연장 1.9km, 45분 소요)
  • 4구간 : 노을길 (황새봉 ↔ 송산유원지 : 연장 1km, 30분 소요)
기본정보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 산32-1